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문단 편집) == 수습 및 후속 조치 == [[파일:attachment/burma04.jpg|width=600]] 대한민국 국적 17명의 희생자들은 대부분 [[고위공무원]]들이었고, [[유해]]는 [[엠버밍]] 과정을 거쳐 비행기로 운구됐다. 외국에서 사망한 사람의 유해를 국내로 송환하여 장사지내는 방안은 대체로 시신을 [[엠버밍]] 처리·보존하여 비행기로 운구한 뒤 국내에 매장하는 방법과 외국 현지에서 화장한 뒤 비행기로 운구하여 국내에 봉안하는 방법의 두 가지로 나뉘는데, 당연히 전자가 훨씬 비싸다. 이 사건의 희생자들은 대부분 공무원 신분이었고, 공무 출장중 순직한 희생자라는 점을 감안해 [[국민장]]을 결정하였으므로, 엠버밍 과정 등 장례 절차 전비용을 전액 국고에서 부담하였다. 참고로 최근 들어 화장 없이 엠버밍 과정을 통해 시신을 국내로 운구해 매장된 사람으로는 [[조양호]] 전 [[한진그룹]] 회장이 있다. 그 전에는 [[미국]] [[호놀룰루]]에서 서거한 [[이승만]] 전 대통령과 [[중국]] [[상하이]]에서 사망한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의 사례가 있다. 10월 9일 사건 후부터 먼저 희생자들의 자택에 먼저 빈소가 차려졌으며, 다음날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현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도 합동분향소가 차려졌다. 11일 유해 도착 당일 서울 [[김포국제공항]]에서 영현봉영식을 연 뒤 [[서울대학교병원]] 영안실에 설치된 합동영현봉안소에 안치됐다. 영결식 전까지 전두환 대통령과 각계 인사, 시민들이 조문 및 분향을 했으며, 동월 13일 [[여의도광장]]에서 '순국외교사절 합동 [[국민장]]'으로 영결식을 치른 후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버마 랑군에는 2개의 육군병원이 있었는데 테러로 사망한 순국자들은 제2병원으로, 부상자들은 제1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이 마침 일요일이어서 2명 뿐인 당직 의사가 수십 명의 사상자를 치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약품과 의료기재의 부족이었다. 소독약품이 없어서 물로만 상처를 씻어야 했고, 가위가 없어서 [[면도칼]]을 사용하기도 했다. 수술실에 에어컨도 없어서 부채를 부쳐가며 수술을 했다. 그 결과 환자들의 염증이 심해져서 2차 수술을 할 때 쯤에는 상태가 악화되어 사망한 사람이 많았다. 본격적인 치료는 사건 발생 3시간이 지나서야 랭군 시내의 각 병원에서 의사, 간호사, 약사들이 총동원되면서 시작되었다. 대사관 직원들과 상사원 가족들은 가정에 비치하고 있던 구급약들을 아낌없이 병원에 제공하였고 환자들을 가족 이상으로 밤새워 간호함으로써 부상자 치료에 큰 힘이 되었다. 당시 미국의 [[조지 슐츠]] 국무장관은 무슨 일이 있어도 생존자를 살리라고 특별 지시를 내린 상태였기 때문에 이기백 합참의장, 이기욱 재무부 차관은 필리핀 클라크 미국 공군기지에 있는 병원으로 후송되어 수술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전두환은 순방 일정을 전면 중단 및 취소[* 다만, 귀국하러 공항에 가던 와중에 측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군병원에 들러서 조의를 표하고 생존자들의 병실을 둘러보았다고 한다]하고 바로 서울로 귀국했고 이후 [[인도]], [[스리랑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미얀마와 같이 순정 일정이 잡혔던 나라들의 방문도 연기되었다. 한편 테러를 저지른 북한 공작원들은 군경의 추적을 따돌리며 양곤강으로 향했다. 여기서 대기 중인 쾌속정을 타고 북한 화물선에 숨어 북한으로 귀환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양곤강에 도착하니 고속정은 없었고, 그들은 북한 화물선까지 갔으나 그마저도 없었다. 결국 북한은 처음부터 그들을 구출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뉴욕타임즈 기사에서는 당시 북한 화물선의 양곤항 입항이 거부되었다고 되어 있다. 결국 공작원들은 김진수만 따로 움직이기로 하고 나머지 두 명 강민철과 신기철은 같이 움직이기로 했다. [[https://youtu.be/J2m0aJJ1GUk|꼬꼬무2 요약]] * 김진수는 새벽 2시에 홀로 양곤 강을 헤엄치고 있는데 새벽에 수영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현지 주민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들에게 포위당했는데 김진수는 [[수류탄]]을 던지려고 안전핀을 뽑았는데 이 안전핀을 뽑는 순간 수류탄이 터져버려 중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 강민철과 신기철은 양곤 강의 뱃사공에게 돈을 주고 배에 타서 강을 건너려 했으나 원래 타고 있던 주민 2명 중 한 명이 배가 너무 아프다며 복통을 호소하고는 배에서 내려서 풀 숲으로 갔다. 이후 복통을 호소했던 주민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들에게 역시 포위당해서 강민철과 신기철은 경찰서로 끌려갔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경찰서에서 총격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신기철은 전사하고 강민철은 도주했으나 얼마 못가서 또 포위당했다. 그러자 강민철도 김진수처럼 [[수류탄]]을 던지려고 안전핀을 뽑았는데 이 안전핀을 뽑는 순간 마찬가지로 수류탄이 터져버려 중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김진수와 강민철이 입은 이 중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둘 다 수류탄을 쥔 쪽 손이 파괴되어 외팔이가 된 것이며 이 중 김진수는 눈에 파편이 박혀 [[애꾸눈]]이 되었다. 던지려던 수류탄 2발이 오작동을 일으킨 이유는, 북한이 [[살인멸구]]를 위해 '''안전핀을 뽑으면 수류탄이 바로 터지도록''' 손을 써놓았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아무리 북한이라고 해도 그 당시의 공업 수준이 수류탄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들 정도는 아니였기 때문이다. 김진수는 폭발로 팔 하나와 눈 한쪽을 잃은데다 남은 한쪽 눈 시력까지 고작 빛과 어둠을 구별할 수 있을 정도밖에 남지 않은 수준으로 손상돼 사실상 맹인이 되었고, 계속 진술을 거부하다(글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정말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처형되었다. 여행 안내서에 따르면 미얀마는 불교국가라 사형제도가 사실상 무의미하나 당시 김진수의 부상이 너무 심각해 고통을 덜어준다는 인도주의적 차원에 따라 사형이 집행되었다고 언급한다. 역시 한 팔을 잃은 강민철은 북한의 테러를 시인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 뒤 강민철은 [[가톨릭]]에 귀의해 [[마태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성사]]를 받았고, 북한의 암살 위협에 괴로워하다 2008년 5월 18일 간암으로 교도소 옥중 사망하였다. 한편, 당시 테러범 검거를 담당했던 미얀마 경찰은 33년 만인 2016년에 미얀마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김진수는 아웅산 묘소 테러범인지도 모른 채 우연히 검거했다"고 밝혔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8576393|아웅산묘역 테러수사 경찰관의 고백 "북한 공작원 검거는 우연"]], 김상훈 방콕 특파원, 연합뉴스, 2016.7.3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